수식어가 필요 없는 브랜드: 뉴욕, 뉴요커
플랫아이언 빌딩 앞 광장의 노천카페
일반적인 미국인의 생활상과는 달리 대도시에 모여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뉴욕 사람들은 독특한 관습과 문화 덕분에‘뉴요커’라는 브랜드를 얻었다. ‘손에 커피를 들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사람’이라는 스테레오타입 이면에는 타인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는 자유분방함이 깃들어 있다. 그곳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특별한 존재가 되는 흥미로운 도시. 뉴욕에서의 일상은 매 순간 신선하고 소중한 경험의 연속이다.
브루클린 브리지 위에서 본 맨해튼
동네 맛집이 세계적인 명물이 되다
“위이이이이잉!” 빠르게 가까워졌다 멀어지는 NYPD(New York Police Department, 뉴욕 경찰국)의 사이렌 소음이 새벽의 정적을 깨운다. 그나마 조용한 축에 속하는 주택가이지만, 방음이 완벽한 최고급 호텔이 아닌 이상 뉴욕 중심부 맨해튼에서 사이렌 소리를 완전히 차단하기란 불가능하다. 서울에서 14시간을 날아와 뉴욕에서 한 달을 보내기로 한 친구는 시차와 소음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내가 깨어나기를 기다리던 눈치다. 낡은 건물의 둔탁한 창문을 힘껏 들어 올려 기분 좋은 공기를 들이마신다. 브루클린 브리지 너머 동쪽 하늘이 붉게 밝아오는 것을 보니 오늘 날씨는 제법 괜찮을 것 같다.
소호에서 산책하다 멋진 카페에서 잠시 쉬어가기
잠을 설친 친구에게 따끈한 커피와 맛있는 빵을 먹이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소호(SoHo)로 향한다. ‘휴스턴 스트리트의 남쪽(South of Houston Street)’이라는 뜻의 소호는 한때 예술가들의 작업실과 갤러리가 많은 문화의 거리였으나 1990년대부터 유명 매장과 레스토랑이 몰려들면서 유동인구가 더해져 패션과 소비문화의 중심지로 변모했다. 럭셔리 브랜드가 즐비한 메인 도로를 살짝 벗어나면 개성 있는 옷가게, 유명 상표의 재고 상품을 모아놓은 셀렉트 숍 등이 들어서 있다.
그런 소호의 끝자락, 작은 베이커리 앞에 새벽부터 사람들이 모인다. 크루아상을 도넛처럼 튀긴 빵을 개발해 유명해진 베이커리다. 작은 가게로 창업해 성공하기만 하면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뉴욕이 주는 특권이며, 동네에서 발견한‘나만의 장소’가 어느덧 세계적인 명소로 커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뉴요커가 누릴 수 있는 작은 호사다.
빈번하게 신호를 무시하는 뉴요커처럼 길을 건너기까지는 약간의 적응 기간이 필요하다
걸음을 재촉하는 인파로 가득한 거리는 뉴욕의 상징적 풍경이자 뉴요커의 보행 습관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맨해튼 도심의 동서 방향으로 난 좁은 길인 스트리트의 간격은 무척 촘촘한 편이다. 1~2분만 걸어가면 다음 횡단보도에 도착하다 보니 빈번하게 신호등을 무시할 수밖에 없고, 차가 지나가지 않는다 싶으면 망설임 없이 길을 건너는 보행법이 뉴요커의 습관이기도 하다. 예상보다 빠르게 차량이 돌진해 오면 아찔한 상황에서도 오히려 운전자에게 짜증을 내는 듯한 모습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시어터 디스트릭트(타임스퀘어)의 현란한 네온사인
뉴욕 경찰과 교통관리국에서는 지속적으로 무단횡단을 자제하자는 캠페인을 펼치고 있지만, 그 개념이 처음 등장한 1920년대부터 오늘날까지‘길의 주인은 사람’이라는 인식을 막을 수 없는 모양이다. 작은 골목길은 물론, 제법 큰 도로까지 일방통행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한쪽 방향의 시야만 확보되면 길을 건너는 것이 어렵지 않다는 것이 이들이 신호를 무시하면서도 비교적 안전하게 길을 건널 수 있는 이유다. 적응하려면 다소 시간이 필요하지만 조금 익숙해지면 무단으로 길을 건너는 대열에 자연스럽게 합류하게 된다.
맨해튼 스카이라인이 보이는 강변 공원의 푸드 페스티벌
뉴요커들의 평일 점심 풍경
맨해튼에서 브루클린까지 느리게 걷기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고 정교하게 얽힌 강철 케이블을 사용한 현수교, 브루클린 브리지. 135년 전의 기술이 여전히 세계인을 매혹하는 이 다리 위에 서면, 평행선상에 있는 또 다른 다리 맨해튼 브리지와 저 멀리 미드타운의 고층 빌딩, 그보다 더 높은 하늘과 맨해튼 동쪽 이스트강의 큰 흐름을 관망할 수 있다. 뉴욕에 사는 이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광경이기에 무심코 지나치는 도로에 불과하지만 연인에게는 완벽한 로맨틱 플레이스이며 한 달이라는 시한을 두고 만나는 이방인에게는 더없이 특별한 순간이다.
다리의 남쪽 끝은 자유의 여신상과 로어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아름다운 강변 공원과 포토존으로 유명한 덤보(DUMBO)로 이어진다. 브루클린 브리지의 웅장한 교각 바로 아래의 페리 선착장부터 자유의 여신상이 더욱 가까이 보이는 룩아웃까지, 깔끔하게 정비된 강변 산책로에는 시민들이 야외 활동을 만끽할 수 있도록 바비큐장과 농구장, 축구장, 공연 시설을 마련해두었다. 이곳에서는 불 밝힌 두 다리 너머로 월 스트리트 고층 빌딩의 휘황한 모습이 보여 뉴욕을 대표하는 야경 명소이기도 하다.
브루클린 브리지 교각 아래를 지나는 유람선
뉴욕은 날마다 축제
경치 좋은 강변, 도심의 작은 스퀘어, 평소 자동차가 다니던 도로 위는 주말이나 특별한 날이면 거대한 축제의 장으로 변모한다. 현지인과 여행자 모두가 열광하는 축제에 참여하는 것은 로컬 문화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한여름 밤의 야외 콘서트, 오감을 자극하는 맛있는 음식을 한자리에서 맛볼 수 있는 푸드트럭 페스티벌, 독립기념일에 펼쳐지는 성대한 불꽃놀이와 대형 크리스마스트리에서 빛나는 오색 전구까지. 뉴욕에서 한 달쯤 지내다 보면 여러 축제를 다양하게 경험하게 된다.
오 헨리의 단골집이었던 피츠 태번
특별한 축제가 없더라도 매일 저녁 유쾌함을 나눌 수 있는 유럽풍 선술집‘태번’이 있다. 삐걱거리는 목재 인테리어와 벽면 가득 술병이 진열된 바가 인상적인 태번의 역사는 맨해튼에 네덜란드인이 처음 정착했을 무렵인 16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독립, 남북전쟁, 금주령 시대를 거치면서 수없이 많은 사건과 놀랄 만한 이야기를 간직한 유서 깊은 태번은 낮에는 간단한 식사를 파는‘아메리칸 다이너’ 역할을 하고, 밤에는 퇴근한 직장인들이 술잔을 기울이는 지역의 커뮤니티로 남아 있다. 유니언 스퀘어 부근의‘피츠 태번’은 1864년 영업을 시작해‘뉴욕에서 가장 오랫동안 운영 중인 태번 중 하나’라는 타이틀과 함께 작가 오 헨리가 단편<크리스마스 선물>을 집필했다는 일화를 지녔다.
로어 이스트 사이드의‘맥솔리스 올드 에일 하우스’는 링컨 대통령과 존 레넌 등 다양한 계층의 유명 인사들이 거쳐 간 곳이다. 1910년 이후로 장식품을 한 번도 교체하지 않았다는 가게에는 옛 신문 기사와 골동품이 빼곡하게 장식되어 있고, 저렴한 가격 덕분에 젊은 층에게도 큰 사랑을 받는다. 서비스는 다소 투박하지만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웃음과 노랫소리가 뉴욕의 밤을 수놓는 태번에서 어렵지 않게 맥주를 주문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다면 어느덧‘뉴요커’에 가까워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것이다.
뉴욕의 태번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뉴요커(맥솔리스 올드 에일하우스)
알면 알수록 사랑스러운 도시, 지금 이 순간에도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역동적인 도시. 저마다 다른 생각을 품고 찾아오지만 뉴욕의 매력에 한번 사로잡히면 평생토록 기억하게 된다. “한번 뉴요커는 영원한 뉴요커(Once a New Yorker, always a New Yorker)”다.
글·사진_ 제이민
여행 작가. <미국 서부 100배 즐기기> <프렌즈 뉴욕> <미식의 도시 뉴욕>의 저자.